지구는 넓다. 건물도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너른 공간을 누릴 수 있게 허락된 대상이 우리는 아니다.
전파와 비행기를 타고 세계의 외연은 점점 넓어져만 가는데, 정작 우리가 뿌리내릴 한 뼘의 토양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도시는 정신없고 그 너머는 휑하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Team.MOi는 자신만의 공간을 꾸리고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보기로 했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타원 화면 속 은령. 햇빛을 등지고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타원 바깥에는 파란색이 가득 차 있고, 중앙 하단엔 파란색으로 ‘대구 살이 30년째’라고 적혀 있다.
조그마한 온라인 의류 쇼핑몰 사장이자,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AE로 활동하는 은령을 대구에서 만났다.
은령은 잘하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경험한 세상도 넓은 사람이었다. 그런 은령이 왜 뭐 하나 새로울 것 없는 고향 대구에 다시 터를 잡았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엿보기 위해 은령에게 ‘가장 좋아하는 대구’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목련과 푸른 담쟁이
푸를 청(靑)에 담쟁이 라(蘿)라는 이름처럼, 봄이 되면 오래된 건물에 걸려 있는 담쟁이덩굴이 푸르러지는 곳. 은령이 우리에게 처음 소개한 장소는 청라언덕이었다.
도시마다 지명을 들으면 으레 상상되는 이미지가 있기 마련이다. 만약 이 중에 가 본 곳이 있다면? 그 상상은 더욱 구체화될 것이다. 사람 또한 어떤 도시에 살고 있는지에 따라 삶의 양식이 조금씩 다르다.
인간은 자신이 발 디딘 땅 위에 이야기를 축적하고 흔적을 남긴다. 공간에 쌓인 기억은 필연적으로 그 공간에 머무는 인간의 의식 전반에 영향을 준다. 이러한 ‘주고받음’은 우리가 도시를 독립적인 존재라고 여기거나 단순히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으로 간주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야기로 감각하는 도시
우현의 인터뷰 영상 캡처. 좌측에는 “’이 지역을 더 많이 알아가는 것밖에 할 수 없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라는 자막이 적혀 있다. 우측에는 검은색 후드티셔츠를 입고 안경을 쓴 채 밝은 표정을 띤 우현의 상반신이 보인다.
특히나 대대로 원주에 뿌리내린 토백이¹ 우현은 도시와 수많은 ‘주고받음’을 경험한 사람이다. 원주엔 할머니가 ‘젊었을 때 가던 곳’이나 부모님이 ‘첫 데이트를 하려다 실패한 곳’처럼 손때묻은 이야기가 가득했다. 수많은 이야기를 물려 받으며, 우현은 ‘그때, 그곳에 있었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됐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유명 토크쇼에 초대되어 나의 일생을 자랑스레 늘어놓는 상상을 한다. 무대에 오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삼남은 그런 상상을 남들보다 더 많이 했을 것이다. <삼남쑈>는 그런 삼남의 상상을 작게나마 실현하는 공간이다. <삼남쑈>엔 누구나 알 법한 유명 호스트는 없어도, 연예인 뺨치는 화려한 옷차림으로 무장한 정삼남 할머니가 있다.
정삼남 할머니는 그간 맺혀 있던 아쉬움과 서운함을 토로하면서도, 일생일대의 특별한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즐거워 보였다. 이야기를 듣던 우리는 어느새 78세의 ‘할머니’가 아닌 쾌활한 성격의 한 ‘사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엄청난(!) 재주
정삼남은 다재다능했다. 공부, 노래, 옷 수선 등등 수많은 재주가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더랬다. 하지만 그 무수함에 가려져 당신도 미처 몰랐던 최고의 재주는 ‘기르기’가 아닐까? 한 무더기의 다육식물과 물살이 수조 서너 개가 당당한 자태로 그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 반, 풀 반의 거실 정경이 할머니의 기르는 재주를 단번에 실감케 만든다.
거실에 쪼그려 앉아 수조를 바라보는 정삼남 할머니. 화면 아래엔 “(집사의 숙명) 어디 못 가고 집으로 맨날 들어오고”라는 자막이 적혀 있다. 온 집안에 가득한 다육이와 물고기는 할머니가 지갑으로 낳아 마음으로 기른 자식들이다.
할머니는 빼곡한 군집을 이룬 화분과 수조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그는 꽤 많은 시간을 화분과 수조 소개하는 데 할애했고, 이야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애정이 듬뿍 담겨 상기된 목소리는 덤이다. 그전까지 거실 바닥에 앉아 과거를 미련 없이 넘기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어떤 것이라도 훌륭히 길러내는 재주를 가진 정삼남 할머니가 물살이와 다육이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반짝임이 가득했다.
인생은 나으 것이여 46년생 정삼남 DIVA가 MOi에게 들려주신 이야기는 2부에 걸쳐 공개됩니다
뽀글거리는 짧은 파마머리, 깊어진 이마 주름, 촌스러운 이름, 억센 손아귀…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어느 세대를 떠올린다. 그 수많은 주체가 고작 하나의 이미지로만 그려진다니 놀라운 일이다. 대화가 멈추자,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고, 궁금하지 않으니 무시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과 공간과 역사가 궁금했다.
삼남의 화려한 드레스와 진주 목걸이 위로 레트로한 느낌의 “삼남쑈” 타이틀이 적혀 있다.
한 주택가 골목길 안쪽 가장 화려한 외관을 가진 삼남의 집을 찾았다. 대문부터 계단까지 계절감이 잔뜩 드러나는 화분이 가득한,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올 법한 그 시절 하숙집 바이브를 가진 집. 집 밖까지 삼남의 발랄한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삼남은 화려한 비즈로 꽃을 수놓은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우리를 반겼다. 알알이 고운 진주 목걸이와 큼직한 반지도 잊지 않았다. 그 모든 차림새가 과함에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의 유쾌한 말투와 서글서글한 얼굴을 더욱 빛나게 해줄 뿐이었다.
그만 낳으라고 그만이?
삼남은 셋째딸이다. 그의 가족은 넷째로 아들을 낳으라는 의미로 아가의 이름을 ‘삼남’이라고 지었다. 아가의 행복을 기원하거나 건강을 바라는 뜻이 전혀 담기지 않았다. 끝순이, 말순이, 그만이.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들’을 위한 존재가 된다.
경자 할머니의 이야기는 시작되는 족족 제가 가야 할 길을 이미 다 안다는 듯 매끄럽게 이어져 나갔다. 콤플렉스로 여겨질 만한 이야기나 상처가 되었으리라 짐작할 만한 이야기를 꺼낼 때도 할머니는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그 단단함과 당당함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었고, 무엇이 그를 그토록 평안하게 하는지 궁금하게 했다. 이내 그 힘의 기둥이 신앙임을 알았다.
삶의 행로마다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경자 할머니의 신앙은 그가 가진 곧음의 원천이자 온 생을 관통하는 대주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신의 이름을 빌렸으나, 결국 한 인간에 관한 것이다.
회색 바탕에 바이닐 음반 목업. 재킷은 침대에 구부정히 걸터앉아 기도하는 경자 할머니의 흑백 사진이다. 사진의 테두리에 ‘경자 이야기 3’, ‘VERITAS FORTITUDO MEA EST’ 등의 흰색 글씨가 배치되어 있다.
은혜, 경자의 행복을 찾아서
성경엔 예수가 직접 제시한 모범 기도¹가 기록되어 있다. 그 이상적인 기도에서조차, 으레 기도자는 신에게 많은 것을 부탁한다. 일용할 양식을 줄 것, 죄를 사하여 줄 것, 시험에 들게 하지 말 것, 다만 악에서 구할 것.
그러나 경자 할머니는 큰 소망보다 사소해 보일 만치 작은 감사를 앞세운다. 당신의 인생에 있어 교회를 다닌 것만으로 신의 은혜라고 말했다.
타고난 이야기꾼, 42년생 안경자 할머니가 MOi에게 들려주신 이야기는 3부작으로 구성되어 1부씩 공개됩니다
우리는 노인과 함께 살아가지 않는다. 키오스크 앞에서, 깨알 같은 차림표와 영어로만 쓰인 간판 앞에서, 깎아지른 계단과 '스마트' 고지서 앞에서. 늙은 인간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으레 줄어든 입지만큼 말수가 적어진다. 이야기가 준 만큼 이해와 멀어지고, 다시 그만큼이나 설 자리가 좁아진다. 그렇게 어떤 인간들은 납작한 '틀딱충'이 되어버렸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두툼히 쌓아온 이야기들은 다 어디에 숨어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한 할머니를 찾았다.
좁은 거실. 백발의 할머니가 홀로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다. 붉은 꽃무늬 벽지가 눈에 띄는데도 어쩐지 정갈하고 고요해 보인다.
아주평범한할머니
할머니는 평범했다. 하얗게 센 머리, 구부정한 허리. 텔레비전 소리만이 적막을 위로하는 집과 주인 따라 나이 먹은 물건들. 돌아오지 않는 입맛과 야속한 기억력까지 여느 노인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여든두 살 할머니는 이제 신에게 마지막을 부탁하는 기도를 올릴 뿐이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장수하고 살기를 원치 않아요. 세상도 험하고, 노후대책으로 모아놓은 돈도 없고, 자식들한테 부담되기도 싫고. 그러니 하나님 나를 좀 편안하게. 편안하게 불러가 주셨으면 좋겠다고…”
경자 할머니가 퀴즈 도중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O와 X를 표시한 사진이 엉성한 풍경 그림 위에 올려져 있다. 상단에는 “드디어! ESTP 할머니 개봉박두 티저”라고 적혀 있고, 우측에는 경자 할머니가 배시시 웃는 얼굴이 텔레토비 장면처럼 해 속에 들어있다.
할머니의 이름과 삶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Team.MOi가 처음으로 들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안경자 할머니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경자 할머니, 할머니의 이름과 삶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요?
타고난 이야기꾼인 경자 할머니가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야기는 < 일제강점기부터 전쟁까지, 역동의 시대 속 이야기>, <개구쟁이 어린 시절을 지나 상여자가 된 이야기(연!애!사!도 들려주신 건 안 비밀 🫣)>, < 힘의 원천인 신앙과 노인이 된 오늘의 이야기>로 나뉘어 3부에 걸쳐 공개됩니다!!
2023년 6월 26일(월) 오후 10시 공개 <경자 이야기: 1부 - 내 이름은 안경자> 많관부
본편에 앞서, 경자 할머니와 함께한 ‘할머니’ 스테레오타입 OX퀴즈를 살짝 보여드릴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할머니’들은 어떤 사람인가요? 경자 할머니는 과연 얼마나 ‘할머니’스러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