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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02 경자 이야기 2부 - 경자 전성시대

Created
2023/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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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i가 들은 이야기
Tags
EP02
노인
이름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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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이야기꾼, 42년생 안경자 할머니가 MOi에게 들려주신 이야기는 3부작으로 구성되어 1부씩 공개됩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전쟁까지, 역동의 시대 속 와기 경자   상여자 경자 씨(연!애!사!도 들려주신 건 안 비밀 🫣)   오늘의 경자 할머니와 경자 권사님
경자 할머니의 이야기는 깊은 밤까지 이어졌다. 그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우리는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웃느라 바빴다.
이번 2부에서는 유독 우습던 이야기를 모았다. 공교롭게도 가장 ‘경자다운’ 이야기들이다. 또렷한 표현과 확고한 호불호가 가득 담겼다. 그가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살아남는 데 어린 시절을 다 보냈음에도, 결코 인생의 주도권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주 비범한 할머니

분명 할머니는 평범했다. 할머니가 본격적으로 당신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까진 말이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우리의 고정관념은 위기를 맞아야 했다.
“사탕 같은 걸 주면 나는 좋다고 다 먹는데, 우리 언니는 꼭 하나만 먹고 나머지는 할머니한테다 맽기는 거야. 그러면 나는 이제 속으로 그러지. ‘내가 이따가 안 뺏어 먹나 봐라!’ … 그래서 어떤 적에는 언니가 사탕을 까고 있으면 탁! 낚아채 갖고 도망갔어.”
위 인용문 영상.
백발의 꼬부랑 할머니가 언니를 가뜬히 골려 먹는 장난꾸러기였을 줄, 또 시대를 한참이나 앞서간 페미니스트였을 줄 우리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 모든 이야기를 능숙하고 막힘 없이 풀어가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예사롭지 않은 할머니였다.

화끈한 경자 씨

우리가 처음 경자 할머니를 찾았던 날, 할머니는 불 꺼진 거실에 앉아 기독교 방송을 보고 있었다. 우린 할머니에게 단정하다는 말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의 몸짓은 여유로웠고, 집안 곳곳에 놓인 성경 구절이나 교회에서 받은 상패 같은 것들도 저마다 제 자리가 있어 보였다.
경자 할머니의 옷장. 차분한 색감의 바지 여러 벌이 칼각을 유지한 채 걸려 있다.
그러나 겉보기에 단정하다고 해서 그 내면까지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야기 속 경자 할머니는 주눅 들거나 남의 시선에 휘둘리는 일이 없었고, 할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예컨대 모두가 신파극을 사랑할 때,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노골적인 사랑 놀음’을 보고 만다거나,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 헤어지면 안 되겠냐는 데이트 상태에게 ‘돌아가세요, 이건 실례잖아요!’라고 쏘아붙이는 식이다. 그 치근대는 남자를 휘어잡아 결국 결혼했다는 사실까지, 완벽하게 화끈하다.

멋쟁이 사나이!

그의 남편은 단체 사진 속 경자 할머니에게 홀딱 반해서, 간절하고도 끈질긴 구애를 펼친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당대에 보기 드문 스윗가이였던 그는 할머니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는데, 차고 넘치는 편지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할머니는 단 한 통도 간직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의 아들 내외가 딱 한 통을 기록해 두었다. 첫 만남을 회상하며 쓴 편지다.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해 남편의 애정 어린 시선에 담긴 그 시절 경자 할머니를 생생히 엿볼 수 있었다.
< 노루 꿈을 꾸면 님이 온다 하던가 >
때: 1963.03.03.
사람의 지각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한낱 꿈속에서 본 환상으로 현실조명이 가하다고 볼 때에 어찌 신비스런 영역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口傳(구전)되는 解夢說(해몽설)에 근거한 吉·凶夢(길·흉몽)을 요약건대 잘 익은 과실이나 붉고 검은 고추를 보면 아들·딸을 구분하는 태몽이라 하였고- 王(왕)이나 돼지나 큰불 나는 것이나 피 흘림 따위를 보면 뜻하지 않은 재물을 얻겠고, 뛰노는 노루를 보거나 잡아 안으면 삶 속에 현실로 사랑하는 님이 생긴다 하던가-
[꿈의 내역] 지난밤 꿈속에서 아름다운 숲속 신록이 우거진 동산에 이를 때에, 나무 가지가지 마디엔 연분홍 꽃 송이송이 아치를 이룬 듯 청초한 풀밭 나뭇가지 사이로, 황금색 노루 한 마리가 사뿐 사뿐히 연한 풀을 뜯으며 걸음을 옮길 때에, 조심스레 다가서서 내민 나의 손길을 기다린 듯 반항 없이 나의 품을 파고드네요. 오호라!! 꿈에 천사, 그대는 예정된 나의 인생길에 나야나¹가 되고자 반려자의 수순 밟기를 시작하는 것 같구나.
[첫 만남] 눈 부신 햇살에 아침이슬 걸치고 한낮에 열기가 대지로 옮겨질 때에, 연두색 밝은 정장으로 화사하게 차려입은 예쁜 숙녀 천사가 미닫이 소리 크게 울리며 들어서는 첫 순간, 나는 황홀하게도 어느새 사랑에 사로잡힌 노예가 되었도다.
[감격] 사랑하는 나야나, 나의 님이여!! 우아하게 미소 짓는 그대 고운 얼굴은, 예술도 무색해 할 양 볼에 보조개는!! 소망이 담긴 행복의 우물이 되고, 유난히도 희고 정교한 그대의 치아는 불타는 나의 연정에 살며시 입맞춤을 하는구나.
[행복] 그대는 나와 함께 부부의 인연으로 장래를 설계하며 사랑의 동반자가 되었으니, 어느새 나의 마음 밭에 행복의 씨앗이 파종되었고 흐르는 세월 속에서 사랑의 열매들이 결실되었네. 이제는 두 아들들이 장성하여 성가를 이뤘고 귀여운 손자 손녀도 보았고 또 볼 것인즉, 정녕 마음에 풍요로움과 참 행복이 차고 넘치는도다.
[완성] 오늘로써 여생 길을 새롭게 시작하고 출발을 할 때에, 나야나 한 마음 이루고 헌신하듯 사랑하며 행복하다가,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땅에서의 시간들이 기한을 다할 때에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에서 새 생명을 덧입고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 모시고 영원토록 찬양하며 살리로다. 셀라!!
나 병 식 나야 경 자
경자 할머니는 남편의 팔불출 이야기를 잔뜩 들려주며 창피하다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남편 이야기를 들려줄 때 유달리 자주, 크게 웃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한숨이 사실은 자랑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경자 할머니가 “멋쟁이 사나이!”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아무것도 해줄 말이 없다던 할머니의 이야기보따리는 좀처럼 바닥을 보이지 않았다. 방대한 이야기 중에 무엇 하나 덜 사랑스러운 게 없어서, 모든 멤버가 편집 과정 내내 아쉬움에 끙끙댔다.
경자 할머니는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혼자만 알고 살았을까? 할머니의 과거를 들여다볼수록 그의 현재가 궁금해진다.
¹ 나야나: 병식과 경자의 애칭. ‘그대가 곧 나’, ‘내가 곧 그대’라는 뜻을 담고 있다.
2부 영상 45초 경, ‘할머니’ 역의 이름이 ‘몰라’로 표기되어 있다. 경자 할머니를 비롯하여 그 누구도 ‘할머니’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경자 할머니는 ‘할머니는 그저 ‘할머니’였을 뿐, 당대의 여자들에겐 이름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3부에서는 경자 할머니의 ‘오늘’과 그의 신앙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2023년 8월 14일(월) 오후 10시 공개 <경자 이야기: 3부 - 진리는 나의 힘> 많관부
기획/취재 Team.MOi
촬영 승비 무니지니 효비
편집/글 무니지니
목소리 윤승준 CLOVA 더빙 AI(허풍선) 무니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