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은 스스로 이름을 짓는 일에 스스럼없다. SNS뿐만 아니라 회사에서까지, 새로운 이름의 부캐를 만든다. 인간은 호명을 통해 타인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과 연결되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한다.
여기 우리 세대보다 훨씬 앞서 두 개의 이름을 가진 할머니가 있다. 그는 박복연이자 민정숙이다. 우리와 차이가 있다면, 두 이름 중 어느 하나도 스스로 지은 이름이 아니며, 이 중 하나는 이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세월이 흐르며 눈앞의 현실은 흐려져도, 과거로부터 새겨진 기억은 뚜렷해지는 법. 당신의 이름을 민정숙이라 주장하는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았다.
합리적 의심
영상의 시작과 함께 채도가 소거된 화면 속 시계 침이 거꾸로 돌아간다. 할머니의 뚜렷한 기억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한 노인과 물결과 시계 침이 잠시 겹쳤다가 사라지고, 이내 한 할머니가 당신의 나이와 이름을 부인한다.
침대에 누워 카메라를 쳐다보며 “내는 민정숙이지”라고 말하는 박복연 할머니의 모습.
엉뚱한 주장을 내뱉은 할머니가 환자용 침대에 누워 뚱한 표정으로 어깨를 긁적인다. 맞은편에 누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동안 그의 넋이 온전한지 의심하는 일은 합당하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이 이상한 주장의 증인이 되겠다고 나선다.
민정숙 이야기
할머니가 누운 방을 단출히 비추는 화면 안으로 손녀가 등장한다. 손녀는 할머니 앞에 쪼그려 앉아 할머니와 다정한 대화를 나눈다.
손녀와의 평화로운 한때, 그 영원하길 바라는 순간에 할머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위 설명 영상. 화면 왼쪽엔 침대에 누운 할머니와 그 앞에 쪼그린 손녀, 중앙엔 이동식 변기, 오른쪽엔 보행 보조기가 보인다. 할머니와 손녀가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이야기는 나이 든 당신의 신체를 대신해 손녀의 입을 빌려 펼쳐진다. 화면은 손녀와 할머니의 눈맞춤만을 미동 없이 비춘다. 손녀는 자신의 오랜 무지를 고백한 뒤,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할머니의 법적 이름인 박복연이 ‘가상 인물’이라는 기막힌 내용과 대조된다.
1950년 3월에 결혼한 민정숙은 전란에 남편을 잃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정숙은 두 번째 가정을 갖고 아이 둘을 낳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이야기다. 아이가 6살이 될 때까지 정숙의 호주가 전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말이다.
정숙의 재혼을 반대하며 호적을 정리해 주지 않은 전 남편의 가족 때문에, 민정숙은 딸의 출생 신고조차 못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라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고육지책뿐이었다. 그렇게 민정숙은 딸을 위해 박복연이 됐다.
그로부터 54년이 지난 후, 정숙의 딸은 민정숙을 ‘민정숙’으로 되돌려놓고자 했다. 하지만 민정숙의 생존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 대부분은 더 이상 세상에 남아있지 않았다. 학교도 다니지 못한 민정숙을 증명할 마땅한 문서도 없었다. 민정숙은 이름을 되찾지 못했다.
다시 9년이 흘렀지만, 달라진 것은 세월뿐이다. 여전히 민정숙은 96세 민정숙이 아닌 90세 박복연으로 살고 있다. 이제 민정숙은 자신이 어떻게 박복연이 되었는지를 잊었다. 하지만 자신의 진짜 이름이 민정숙이라는 사실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손녀는 그 또렷한 기억에 기대, 다시 한 번 민정숙을 ‘민정숙’으로 되돌려 보겠다 공표한다.
실재하는 실제
잠에 든 틈을 타 흘러나오는 꿈같던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화면은 다시 할머니를 마주하게 한다. 천천히, 구석구석, 민정숙을 바라본다.
’실재, 기억, 진실, 이름, 현재, 정숙, 목격, 복연, 증명, 실제’. 산발적으로 뱉어졌던 단서가 조합된다.
이제 이상한 할머니 박복연은 민정숙으로 실재하고, 화면 너머의 모두가 그 진실을 목격한다.
시계침이 원래대로 흐른다.
우리의 친구, 민정숙 님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Team.MOi가 할머니만 만난다고 생각한다면 경기도 오산 곧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올게요
곧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올게요 기획/취재 Team.MOi
촬영 승비 무니지니
편집 무니지니
글 해원 무니지니
목소리 승비 정옥다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