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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01 경자 이야기 1부 - 내 이름은 안경자

Created
202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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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i가 들은 이야기
Tags
EP01
노인
이름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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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이야기꾼, 42년생 안경자 할머니가 MOi에게 들려주신 이야기는 3부작으로 구성되어 1부씩 공개됩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전쟁까지, 역동의 시대 속 와기 경자   상여자 경자 씨(연!애!사!도 들려주신 건 안 비밀 🫣)   오늘의 경자 할머니와 경자 권사님
우리는 노인과 함께 살아가지 않는다. 키오스크 앞에서, 깨알 같은 차림표와 영어로만 쓰인 간판 앞에서, 깎아지른 계단과 '스마트' 고지서 앞에서. 늙은 인간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으레 줄어든 입지만큼 말수가 적어진다. 이야기가 준 만큼 이해와 멀어지고, 다시 그만큼이나 설 자리가 좁아진다. 그렇게 어떤 인간들은 납작한 '틀딱충'이 되어버렸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두툼히 쌓아온 이야기들은 다 어디에 숨어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한 할머니를 찾았다.
좁은 거실. 백발의 할머니가 홀로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다. 붉은 꽃무늬 벽지가 눈에 띄는데도 어쩐지 정갈하고 고요해 보인다.

아주 평범한 할머니

할머니는 평범했다. 하얗게 센 머리, 구부정한 허리. 텔레비전 소리만이 적막을 위로하는 집과 주인 따라 나이 먹은 물건들. 돌아오지 않는 입맛과 야속한 기억력까지 여느 노인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여든두 살 할머니는 이제 신에게 마지막을 부탁하는 기도를 올릴 뿐이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장수하고 살기를 원치 않아요. 세상도 험하고, 노후대책으로 모아놓은 돈도 없고, 자식들한테 부담되기도 싫고. 그러니 하나님 나를 좀 편안하게. 편안하게 불러가 주셨으면 좋겠다고…”
처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할머니는 늙은이 얘기를 들어서 무엇 하냐며 들려줄 말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당신을 궁금해하는 이유를 당최 모르겠다면서도 다행히 방문을 허락했다. 우리는 만났고, 눈을 맞췄고, 이름을 물었다.
이야기하는 할머니의 상반신 화면. 하단에는 “내 이름은 ‘안경자’인데, 순흥 안씨”라는 자막이 적혀있다.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 할머니의 이름은 ‘안경자’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교코가 됐고,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되자 경자가 되었단다. 춘자가 된 언니보다는 당신 이름이 덜 촌스러워 다행이라며 장난스레 웃을 때, 그 물꼬를 따라 묵혀 놓은 말들이 터져 나올 걸 알았다.

피난¹으로 점철된 유년기

경자 할머니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겨우 다섯 살 되던 해, 어머니 등에 업혀 38선을 넘어온 일부터였다.
”우리 어머니는 그때 나를 업었어. 다섯 살짜리가 어떻게 그 산을 넘어서 피난을 나오겠어. … 내가 지금 생각나는 건 개울이 흐르고 이렇게 돌담이 세워진 길이 있는데, 우리 어머니가 나를 업고는 넘어져서 뒹군 게 생각나. 업고 막 뒹굴고. 그래서 놀래서는 그냥 엄마 어깨를 붙들고 늘어지고 막 울고 그런 생각이 나는데…”
6・25 전쟁 당시 피란민 모습이 담긴 흑백 자료 화면. 젊은 여인이 아이를 업은 채 수레를 끌고 있다. 업힌 아이의 손위 형제로 보이는 어린이가 뒤따른다.
인민군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험한 산길을 돌고, 월남 브로커와 실랑이해 가며 어렵게 남한 땅을 밟은 할머니의 가족은 서울에 머물렀다. 시간이 흘러 경자 할머니는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전쟁이 났다.
서울 인근의 이곳저곳을 피란 다니다 1・4 후퇴 땐 열차 지붕에 오른 채 대구로 향했고, 전선이 안정되자 대전으로 이주했다. 역전에 가마니로 움막을 짓고, 온돌이 없어 대패를 깐 단칸방에서 세 가족이 엉켜 살았다. 모진 시절이었다.
경자 할머니가 신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있다. 표정과 상반되는 자막. “나는 무서워가지고 그랬더니/우리 할마이 ‘이 간나야! 빨리 오라 죽는다!’/할머니는 그러고”.
경자 할머니는 처참했던 풍파를 이야기하면서 자꾸만 깔깔 웃었다. 전쟁 중 수도가 함락돼 수업도 듣지 못했는데 ‘김일성장군의 노래’에 맞춰 고무줄을 했다며 깔깔 웃었고, 열차 지붕에 오르기 두려워 망설이다 '빨리 안 오면 죽는다’며 혼났던 얘길 하면서도 깔깔 웃었다.
우리는 (온전한 타의로) 생사의 기로에 섰던 날을 이야기하면서 파안대소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마음을 만들어 낸 세월은 더욱 알지 못한다. 웃어도 될까 싶은 얘기들뿐인데 그냥 웃었다. 깔깔거리는 경자 할머니의 얼굴에서 경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래도 저래도 ‘빨갱이’

‘그러니까나’, ‘배워주다’, ‘할마이’, ‘간나’. 경자 할머니는 종종 희한한 말을 썼다. 너무 어릴 때 떠나와 기억도 그리움도 없는 고향이라지만, 그 흔적이 여태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실 할머니는 당신이 완벽한 서울말을 구사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애초에 ㅗ와 ㅓ를 모호하게 발음한다는 사실은 우리끼리의 비밀로 하자.)
이북 사람이라는 꼬리표도 그랬다. 군사 정권기까지도 ‘이북 말씨’를 쓰는 이는 일단 간첩으로 의심하라는 국가적 지침²이 있을 정도였는데, 특히 냉전이 열전으로 드러났던 6・25 전쟁 땐 그 멍에가 더 가혹했다. 할머니의 가족이 전쟁 전 이념 차이로 월남해 왔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하여간 빨갱이는 빨갱이일 뿐이었고, 빨갱이를 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민군이 가까이 왔다는 정보가 들려오는 날마다 그의 아버지는 산으로 들어가 칡으로 만든 그물 위에서 밤을 보냈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경자 할머니의 손.
이데올로기니, 수복이니 하는 이야기는 어른들의 것이었겠지만, 어린 경자의 세상도 냉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가 피란민인지는 어린이도 단박에 알 수 있던 터였다. 멀끔한 토박이의 말끝마다 ‘피란민’이 붙었다. 싸움이라도 나면 “우리가 피란민 애하고 싸웠다”고 말하는 식이다. ‘우리’에겐 이름이 있지만 ‘피란민’의 이름은 모두 ‘피란민’인 시절이었다. 할머니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사람 취급을 못 받았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효비가 “치사하네..”라고 반응하자, 경자 할머니는 당장에 당신을 괴롭혔던 어린이들을 변호하고 나섰다. 그 변호는 사뭇 열정적이어서, 고작 몇 초 전에 ‘보리문디’들에게 천대받았다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모습이 무색해졌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던 할머니의 얼굴은 꼭 어린아이 같았는데, ‘애들이니까나 모르지!’하고 큰 소리를 내던 순간에 우리는 비로소 어른의 얼굴을 보았다. 멸시에 삐죽대던 어린이는 이제 할머니가 되어 ‘아이들은 그럴 수 있다’고 관용한다. 우리는 할머니와 이야기 나누는 동안 몇 번이나 관용을 배웠다. 어떤 시간이 경자 할머니를 이렇게나 단단한 오늘에 이르게 했을까? 안경자 할머니가 지나온 세월이 더 궁금해지는 까닭이다.
¹ 영상과 글에서 피난(避難)과 피란(避亂)을 병용했다. 자막의 경우 할머니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MOi가 표현하는 경우 ▴전쟁 외의 이동을 일컫거나 포함할 때는 피난을, ▴전쟁 중 이동에 국한될 때는 피란을 사용했다.
² 1980년 제작된 국가 영상물에서 ‘이북말씨를 사용하거나 Kg으로 쌀을 구매하는 사람’을 간첩으로 규정했다. "간첩의 식별(붉은 간첩, 1980)", e영상역사관, 2023.06.25 접속.
2부에서는 경자 할머니의 <개구쟁이.ssul>, <상여자.ssul>, <서윗연애.ssul>이 펼쳐집니다. 2023년 7월 3일(월) 오후 10시 공개 <경자 이야기: 2부 - 경자 전성시대> 많관부
기획/취재 Team.MOi
촬영 승비 무니지니 효비
편집/글 무니지니
목소리 윤승준 무니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