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넓다. 건물도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너른 공간을 누릴 수 있게 허락된 대상이 우리는 아니다.
전파와 비행기를 타고 세계의 외연은 점점 넓어져만 가는데, 정작 우리가 뿌리내릴 한 뼘의 토양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도시는 정신없고 그 너머는 휑하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Team.MOi는 자신만의 공간을 꾸리고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보기로 했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타원 화면 속 은령. 햇빛을 등지고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타원 바깥에는 파란색이 가득 차 있고, 중앙 하단엔 파란색으로 ‘대구 살이 30년째’라고 적혀 있다.
조그마한 온라인 의류 쇼핑몰 사장이자,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AE로 활동하는 은령을 대구에서 만났다.
은령은 잘하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경험한 세상도 넓은 사람이었다. 그런 은령이 왜 뭐 하나 새로울 것 없는 고향 대구에 다시 터를 잡았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엿보기 위해 은령에게 ‘가장 좋아하는 대구’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목련과 푸른 담쟁이
푸를 청(靑)에 담쟁이 라(蘿)라는 이름처럼, 봄이 되면 오래된 건물에 걸려 있는 담쟁이덩굴이 푸르러지는 곳. 은령이 우리에게 처음 소개한 장소는 청라언덕이었다.
은령이 청라언덕을 둘러보는 모습들.
청라언덕은 최근 걸그룹 뉴진스의 ‘DITTO’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유명해지기도 했는데, 은령에게는 이곳이 ‘핫플’이라기 보다 편안함을 주는 공간이다. 주렁주렁 뻗어 있는 덩굴처럼 은령의 기억도 청라언덕 곳곳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청라언덕은 어린 은령의 등하굣길이었고, 할머니 손에 자란 은령이 할머니와 목련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던 장소다. 은령은 아직도 일부러 이 길을 걷기 위해 버스에서 한 정거장 먼저 내리곤 한다고 말했다.
DUSTROBE: 먼지 쌓인 옷장
요새는 청라언덕이 은령의 야외 스튜디오가 되어주기도 한다. 은령이 운영하는 온라인 의류 쇼핑몰 ‘더스트로브’ 때문이다.
은령은 ‘옷장에 먼지가 쌓일 때까지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판매하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자신의 쇼핑몰에 ‘더스트로브’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몇 겹의 비닐봉지에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인 택배가 훨씬 익숙한 사업을 운영하면서도, ‘예쁜 포장보다는 최소 포장을 지향한다’며 갈색 종이봉투에 도장을 찍는 은령이었다. ‘덜 버리는 것’에 관해 고민하는 은령을 최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업계 특성상 새로운 의류를 소비하고 소개해야 한다는 데서 찾아오는 괴리감’인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아, 이거 의미 있는 일이다’라고 생각하면 저는 항상 그게 아무리 힘들어도 그냥 열심히 해왔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그걸 기준으로 내가 앞으로 할 일들을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은령은 자신의 앞에 주어진 문제를 ‘멈춰야 할 이유’로 여기는 대신, ‘다른 길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기폭제’로 생각하는 듯했다.
은령의 인터뷰 영상 캡처. 은령이 번뜩이는 표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은령의 얼굴 주위로 반짝이는 효과와 ‘초롱초롱’이라는 자막이 적혀 있다.
은령에게 의미 있는 일이란 나침반 같다. 그래서인지 하고 싶은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은령의 눈이 이때다 싶을 만큼 반짝였다. 확고한 자신만의 기준을 뛰어넘는 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강연해 보고 싶다는 은령의 대답에 왜인지 ‘은령답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가장 은령다울 수 있는 곳
커다란 창문을 열면 달성공원이 보이는 공간. 은령이 ‘더스트로브’를 운영하는 사무실이다. 청라언덕이 시나브로 쌓인 추억 덕에 사랑하는 장소로 자연스럽게 자리했다면, 사무실은 은령이 애정하는 것들로 채운 은령만의 공간이다. 푸른빛을 좋아하는 은령은 사무실에서 수많은 파란색 소품과 창문 너머 푸른 나무를 눈에 담을 수 있다. 그래서 은령은 가장 ‘은령다울’ 수 있는 곳으로 사무실을 꼽았다. 잠은 집에서 자지만, 꿈을 꾸는 건 이곳 사무실이라고 말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은령.
은령은 자신이 무얼 좋아하는지, 뭐가 어울리는지 스스로 잘 아는 사람이다. 어쩌면 은령이 소개한 모든 것이 은령답던 이유, 그가 고되더라도 의미 있는 일을 좇을 수 있는 이유, 그리고 문제를 발판 삼아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는 이유까지 모두 같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
“저는 제가 다른 나라에 가서 살 수도 있고, 다른 지역에 가서 살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게 됐을 때, 언제든지 돌아가면 마음 편하게 다시 자리 잡고 지낼 수 있는 곳은 대구겠구나.”
은령은 수많은 하고 싶은 일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언젠가 그만뒀던 수영을 다시 배우고 싶다고, 다시 배운다면 초급반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가 왜 굳이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은지, 무언가 초기화하는 일이 두렵진 않은지 물었을 때 은령의 눈엔 (약간의 광기 어린) 흥분과 호기심만 가득해 보였다. 그게 은령이 어디서든 살 수 있고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는 이유처럼 느껴졌다. 은령이 되돌아갈 수 있는 유형의 장소가 대구라면, 무형의 장소는 은령 자신일 것이다.
각자 별도의 현업을 가진 MOi 멤버들이 현생에 치여 업로드를 미루는 동안(…) ‘더스트로브’는 기약 없는 휴식기에 돌입했다.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은령의 앞길은 언제나 은령다울 것을 안다.
야외에 앉아 인터뷰하는 은령의 상반신 모습. 하단에는 ‘다른 지역에 가서 살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해요’라는 자막이 적혀 있다.
우리의 친구, 김은령 님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Team.MOi가 대신 전해드릴,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기획/취재 Team.MOi
촬영 Team.MOi
편집 해원
글 하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