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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03 경자 이야기 3부 - 진리는 나의 힘

Created
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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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i가 들은 이야기
Tags
EP03
노인
이름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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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이야기꾼, 42년생 안경자 할머니가 MOi에게 들려주신 이야기
  일제강점기부터 전쟁까지, 역동의 시대 속 와기 경자   상여자 경자 씨(연!애!사!도 들려주신 건 안 비밀 🫣)   오늘의 경자 할머니와 경자 권사님
경자 할머니의 이야기는 시작되는 족족 제가 가야 할 길을 이미 다 안다는 듯 매끄럽게 이어져 나갔다. 콤플렉스로 여겨질 만한 이야기나 상처가 되었으리라 짐작할 만한 이야기를 꺼낼 때도 할머니는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그 단단함과 당당함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었고, 무엇이 그를 그토록 평안하게 하는지 궁금하게 했다. 이내 그 힘의 기둥이 신앙임을 알았다.
삶의 행로마다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경자 할머니의 신앙은 그가 가진 곧음의 원천이자 온 생을 관통하는 대주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신의 이름을 빌렸으나, 결국 한 인간에 관한 것이다.
회색 바탕에 바이닐 음반 목업. 재킷은 침대에 구부정히 걸터앉아 기도하는 경자 할머니의 흑백 사진이다. 사진의 테두리에 ‘경자 이야기 3’, ‘VERITAS FORTITUDO MEA EST’ 등의 흰색 글씨가 배치되어 있다.

은혜, 경자의 행복을 찾아서

성경엔 예수가 직접 제시한 모범 기도¹가 기록되어 있다. 그 이상적인 기도에서조차, 으레 기도자는 신에게 많은 것을 부탁한다. 일용할 양식을 줄 것, 죄를 사하여 줄 것, 시험에 들게 하지 말 것, 다만 악에서 구할 것.
그러나 경자 할머니는 큰 소망보다 사소해 보일 만치 작은 감사를 앞세운다. 당신의 인생에 있어 교회를 다닌 것만으로 신의 은혜라고 말했다.
“내가 세상 살아오는 동안에 직장생활도 별로 안 했고, 우리 때만 해도 공장에 다니는 거 외에는 뭐 (젊은 여자가 다닐 만한) 직장이 별로 없으니깐. 교회 가면 인기가 많았고, 시키는 것도 많았고. 또 주일학교 교사도 하면서 애들도 잘 따랐고.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것이 참 즐거웠었어.”
그래프 이미지. ‘1940-2020 경자시대 여성과 취업’이라는 제목 아래, 시계열 영역 그래프가 그려져 있다. 시간이 흐르며 인구와 성별 취업자가 늘어나는 모양새인데, 1차 산업 종사자를 제외한 여성 취업자의 증가세가 1970년을 기점으로 특별히 가파르다. 추가로 경자 할머니가 18살이던 1959년의 여성 취업자 관련 통계를 별도 표기했다. 당시 전체 여성 취업자 중 4%만이 5인 이상 사업체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중 87%가 제조업 종사자였음을 알 수 있다. 수치별 출처².
경자 할머니가 제 달란트를 마음껏 펼치기 어려웠을 시대, 그의 신이 그를 썼다. 할머니는 교회에서 신을 찬양하는 동시에 또래와 어울렸고, 노래했고, ‘배워주고’³, 존중받았다. 교회가 경자를 필요로 했고, 경자가 교회를 필요로 했다. 할머니에게 교회가 신앙공동체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이유다.
장난스러운 표정의 경자 할머니 영상. 청년부 시절, 또래 성도들과 가곡<냉면>을 부르던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창신예배당 청년부 시절, 경자 할머니는 내로라하는 명문대 학생 사이 유일한 무학자였다. 물론 우리의 자랑스러운 친구 경자는 기죽기는커녕 ‘안 선생’으로 존중받으며 어울렸다.
그 시절은 경자 할머니에게 무척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청년부 성도들과 이곳저곳을 함께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다 할머니는 대뜸 노래를 시작했다. 당시 어울려 부르던 노래였다. 기억은 기억을 불렀다. 한 소절로 시작한 노래가 세 곡이 되는 동안 할머니의 얼굴엔 점차 생기가 돋아났다.
교회에서 촬영된 경자 할머니 사진들. 미소를 띤 채 예배하는 모습과 또래 성도 사이에서 활짝 웃는 모습이다.

호산나, 경자의 구원을 찾아서

그렇게 신앙에 헌신하며 살아온 경자 할머니는 요새 낯선 문제에 맞닥뜨렸다. 넋은 변함없건만, 육신은 시간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는 그에게 봉사할 수 있는 건강과 끼니를 함께할 식구가 허락되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을 빠르게 느낀다는데, 할머니의 하루는 기도와 성경, TV로 채우기엔 너무 길었다.
경자 할머니는 좀처럼 흐르지 않는 시간을 보내보려 거듭 노력했다. 동네 노인을 사귀어 볼 양으로 경로당에도 나가 보고, 합창단도 알아보고, 한때는 영어와 컴퓨터도 배워보려 도전했다. 유의미한 소득은 없었다. 무언가를 새로 배우기엔 돌아서면 지워지는 기억이 발목을 잡았고, 사람을 새로 사귀기엔 한 공동체에 골몰했던 지난 세월이 발목을 잡았다.
할머니는 교회 밖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경로당 할머니들의 하염없는 며느리 흉과 아들 자랑, ‘고스돕’ 내기에 끼어들지 못했고, 합창을 기대했던 노래 교실에서 떼창을 가르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경자 할머니는 그런 취향이 ‘싫다’고 말했지만, 사실 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끼지 못한 쪽에 가깝다는 사실을 당신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할머니는 ‘그래서 갈 데가 없어 조금 외롭다’며 짧게 웃은 뒤, 구태여 적응할 필요도, 큰 소망도, 기운도, 하고 싶은 것도 죄 없다며 겨우 싹이 난 작은 욕구를 묻어버렸다.
침대에 구부정히 걸터앉아 기도하는 경자 할머니. 화면 중앙에 ‘참 쉬는 날 없었구나’라는 찬송가 가사가 적혀 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경자 할머니의 시팅 코미디는 이야기의 시점이 현재로 돌아오자 급히 막을 내렸다.
무얼 먼저 묻지 않아도 “내가 웃기는 얘기 하나 해?”하며 이야기를 쏟아내던 경자는 사라지고, 완연한 노인이 나타났다. 우리가 처음 할머니를 찾았을 때, 불 꺼진 거실에 앉아 ‘들려줄 말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던 얼굴이었다. 할머니도 그의 공간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을 뿐인데, 한바탕 웃음이 가신 뒤의 적막은 새삼스럽게 우리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시편 23편, 경자의 평안을 찾아서

목소리가 사그라진 뒤로, 경자 할머니는 몇 번이나 ‘자식들에게 짐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할머니가 자꾸 당신에게 ‘짐’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는 게 속상해서 우리는 서로 목 끝까지 차오른 말대꾸를 언제 내뱉을지 별렀는데, 결국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토록 단단하던 경자가, 처음으로 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경자 할머니의 눈에서 금세 불안이 가셨다. 음성은 여전히 나직했지만, 힘이 실렸다. 신에게 모든 불안을 맡긴다는 이야기부터였다. 할머니는 지금껏 당신을 돌보아 준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며, 그저 편안하게. 편안하게 불러가 달라는 한 가지 부탁만을 남겼다.
경자의 집에서 올려다본 복도식 아파트. 화면 중앙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성경 구절이 적혀 있다.
수없이 성경을 탐독해 왔을 경자 할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성경 구절은 시편 23편이다. 그 구절이 할머니를 평안으로 되돌려놓은 열쇠였다. 할머니는 한 구절 한 구절을 암송해 가며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세상 눈으로 볼 때는 부족한 게 많대도, 내 마음으로는 부족함을 안 느끼고 사는 거지. 이게 얼마나 행복한 거야. 사람들은 부족함을 없애려 해도 안 없어져서 그러는데, 나는 부족함이 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사니까. … 나를 그렇게 보살피시는 거야. 그러니까 두려움도 없고. 내 가진 것 좀 없으면 어때. 남한테 꾸러 안 가면 되는 거지. 뭐 있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니잖아? 내가 행복을 느껴야 행복한 거지. 그런 믿음으로 살고 있어.”
경자 할머니는 우리에게 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개 꺼낼 일 없던, 꺼낼 수 없던,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이었다. 할머니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기뻤다.
우리는 이제 경자를 손톱만큼이나마 알게 되었을까. 겨우 이 정도 질문에도 대답하기 망설여진다. 물론 더 많은 이야기를 알게 되더라도 결국 경자를 다 알 순 없을 것이다.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라곤, 딱 알게 된 만큼 더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뿐이다.
알면 사랑한다. 사랑할 기회를 준 우리의 친구 안경자에게 특별한 감사를 전한다.
¹ ⑨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⑩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⑪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⑫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9-13, 개역한글. ‘주기도문’, ‘주님의 기도’ 등으로도 불린다.
² 그래프 수치별 출처.
³ 경자 할머니가 사용하는 ‘가르치다’의 이북 방언.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시118:25)라는 뜻의 히브리어 기도문. 「호산나」, 『교회용어사전 : 교회 일상』, 생명의말씀사, 2013.
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②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③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④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⑥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개역개정.
지금까지 우리의 친구, 안경자 님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Team.MOi가 만난 또 다른 할머니 이야기2023년 9월 29일(금) 오후 10시에 공개됩니다
기획/취재 Team.MOi
촬영 승비 무니지니 효비
편집/글 무니지니
목소리 윤승준 무니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