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i의 시선]에서는 Team.MOi 멤버가 전달자로서 영상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냅니다. |
경자의 집 거실, 경자와 MOi 팀원이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경자는 눈을 참 잘 마주친다. 청자의 눈을 얼마나 골고루 들여다보는지 매번 감탄한다. 인터뷰할 때 MOi 팀원 서너 명이 찾아갔는데, 그러다 보니 경자의 시선을 붙잡는 일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사방에 흩어진 팀원들 눈을 다 바라보는 바람에 앵글 잡기가 힘들 정도였다. 마음을 나누고자 하는 그의 친절함이 느껴져 신이 나기도 했다. 우리는 이 시선의 습관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다. 말할 것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거나 관심이 없을 때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습관이다. 분명 경자는 탁월한 이야기꾼일 것이라 확신했다.
역시 경자는 근사한 이야기꾼이었다. 뒤이어 출연할 다른 할머니처럼 매콤하고 맛깔난 단어를 택한다거나 방을 데굴데굴 구를 만큼 유머러스한 편까지는 아니다. 경자의 묘사법은 그의 옷장처럼 아주 정갈하다. 완성형의 문장을 뱉고 불필요한 수식도 잘 붙이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는 다이나믹하다. 입으로 뚝딱 장편 소설을 만든다. 그리움이 담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금방 그 시절의 경자로 돌아간다. 뽀얗고 인자한 얼굴이 아주 다양한 표정으로 바뀐다. 그 순간들을 포착했다면 영상을 5배 더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자매와의 일화를 얘기할 때는 당장 사탕을 입 안에 가득 쑤셔 넣은 말괄량이 소녀가 된다. 배우자와의 첫 만남 얘기를 할 땐 무딘 가시가 잔뜩 돋친 새침데기가 된다. 아들 이야기를 할 땐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신의 얼굴도 얼핏 보인다. 그에게 알맞은 시대가 주어졌다면 무대 위에 살았을 것이다.
경자와의 대화에 흠뻑 빠져있던 우리는 뒤늦게 영상을 살펴보다 알아차렸다. 경자는 꼭 다른 사람의 말과 시선을 빌린다. 성격을 물으니 “언니가 나를 차갑다고 하더라”라고 답한다. 취향을 물으면 “남편이 이걸 좋아해서 자주 먹었다”라고 답한다. 도통 주어를 자신의 것으로 가져가지 않는다. 영상에서도 느껴지듯 그는 누군가와의 관계로 그 장면을 기억한다. ‘언니는 할머니에게 사탕을 맡겼는데’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든지, 극장에서 처음 영화를 볼 때 ‘아버지는 쿨쿨 잠들었는데’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든지.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그 습관을 알아챈 MOi 팀원이 끝까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묻자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경자는 늘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우선시하고 그 관계 속에서 자아를 찾아내는 삶이었을 테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경자를 해석하기로 했다.
배우자와 경자
경자가 가장 솔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관계다. 거짓을 말하지는 않으나 감정에 몇 겹을 덧붙인다. 병식의 편지만 보더라도 그가 경자에게 얼마나 최선을 다해 마음을 표현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비해 경자는 배우자와의 일화를 빙빙 돌려 소개한다. 그렇게 오래 걸려 도착한 말끝은 결국 병식이다. 온 수식 문장들을 걷어내면 아주 잘생긴 병식과 매 순간 사랑을 고백한 병식이 남는다. 흔히 이런 모습을 ‘츤데레’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이를 ‘고급진 자랑 방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병식과의 일화를 말할 때 경자의 얼굴은 봄과 같다. 화사하고 생기가 넘친다. 공기도 순식간에 따스해진다. 눈은 찌푸리지만 입꼬리는 하늘을 향해 있다. 툴툴거리는 말도 그저 사랑에 빠진 소녀의 민망함으로만 느껴진다.
가족과 경자
평생을 함께했음에도 서운했던 것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가족이다. 그러다가 한없이 고마워져 언제나 그리운 것 또한 가족이다. 경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가족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시니컬하다.
<내 이름은 안경자>를 보면 함께 웃지 못하는 순간이 존재한다. 내용은 참 가슴 아픈데 그는 미소 지으며 말한다. 내가 감히 추측하건대 그 시절 속 가족들과 함께하던 시간이 자연스럽게 웃음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생사를 넘나드는 여정을 함께 하며 촘촘하고 다정한 감정이 쌓였을 것이다.
신과 경자
경자에게 하루 일과를 묻자 성경과 교회가 반복되어 나왔다. 안 그래도 집 곳곳에 남겨진 그리스도의 흔적에 신이 여러 번 언급되리라는 것은 눈치챘다. 냉장고에는 크리스마스 기념 자석들이 가득 붙어있다. TV 옆에는 교회에서 받은 감사패가 놓여있다. 외국으로 전도 나간 아들 가족 집에서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경자 일상의 흔적이다.
신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경자에게 조심스레 죽음에 대해 물었다. 역시나 그의 이름이 먼저 나왔다. 그와 가장 복잡하고 깊게 연결된 관계라는 것쯤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경자의 마지막 이야기는 그의 노래로 끝을 맺는다. 웅장한 목소리로 신을 찬양한다. 신과 경자의 관계는 찬양가를 부르는 모습으로 그 거대함을 느낄 수 있다.
경자의 지난 세상을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그가 평소에 삼키는 말이 궁금해졌다. 분명 언니와 만든 만두 대신 꿀꺽 삼킨 생각과 성경 읊는 소리에 떠내려간 경자만의 이야기가 많았을 것이다. 열심히 생을 빚어온 경자가 수많은 관계를 통해 사랑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내기를 바랄 뿐이다.
글 정옥다예
사진 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