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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다고 해서

Created
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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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i의 시선
Tags
EP06
노인
이름
기억
[MOi의 시선]에서는 Team.MOi 멤버가 전달자로서 영상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거나, 꺼내지 않았거나, 꺼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더 쉽게 미움받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할머니’들을 찾아 이야기를 묻는 일을 이 프로젝트의 처음으로 삼았다. 오랜 세월 두툼한 이야기를 쌓아온 존재이자, 언젠가 우리 자신이 될 할머니.
할머니들을 실제로 찾아뵈면서,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눈을 맞추고 이름을 물었을 뿐인데 묵혀놓은 말들이 터져 나왔다. 낡은 기억이 꼬리를 물고 물꼬를 따라 흘렀다. 깊은 주름은 늘 우리의 의도보다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듣는 일 자체가 우리에게 즐거웠다.
침대에 누워 있어 가로로 보이는 정숙의 반쪽 얼굴이 화면에 가득하다.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이야기가 없진 않아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정숙의 이야기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 흥미로운 이야기에 잔뜩 마음이 동했다. 동시에 팀원 모두의 마음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
민정숙의 나이 아흔여섯, 그와 긴 대화를 나누는 일은 불가능했다. 요양 보호사의 돌봄을 받으며 난간이 세워진 침대 위에서 하루를 보내는 정숙. 그의 체력이 허락한 잠깐의 대화에는 이미 내뱉은 말 몇 마디가 반복될 뿐이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전달하기로 한 이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찍을 수 있고, 어떤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지 한동안 답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정숙의 이야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민정숙이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숙은 63년 동안 ‘복연’이라는 호명에 대답하면서도, 여태 명확하게 본인이 ‘민정숙’임을 인지하고 있다. 그만한 꼿꼿함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그의 여생에 ‘민정숙’으로서의 기록이 남겨지길 원했다.

‘미정이 큰딸’, 승비

Team.MOi의 기둥 같은 멤버이자 정숙의 사랑스러운 손녀, ‘미정이 큰딸’ 승비가 이야기의 전달자를 자청했다. 그렇게 그의 이야기를 손녀의 입을 빌려 대신 듣고, 남기고, 전하는 <민정숙 어르신 이름 찾기>가 만들어졌다.
평온해 보이는 정숙의 방. 침대에 누워 있는 정숙과 옆에 쪼그려 키를 맞춘 승비가 손을 꼭 붙잡은 채 눈을 맞추고 있다.
잔뜩 냉소적이다가도 유독 어르신들께 친절한 승비는 정숙의 손에 자랐다. 그런 승비에게 민정숙은 늘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 그 이상의 위치를 점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숙에게 승비도 분명 그런 존재일 것이다. “네가 미정이 큰딸이냐?”, “아이 예쁘다”, “이쁜이, 우리 이쁜이”, “누가 이렇게 이쁠까, 요고?”, “고마워”. 정숙이 승비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반복하는 몇 마디만으로도 그 사랑을 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미정이 큰딸’인 건 잊어도 돼”

이토록 사랑이 흘러넘치는 조손간에 한 가지 숙제가 남았다. 민정숙의 진짜 이름을 찾는 것. 승비는 정숙의 엄마도, 딸도 해내지 못한 그 숙제를 손녀인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
승비가 정숙에게 쓴 손편지 일부.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내가 ‘미정이 큰 딸’인 건 잊어도 돼. 내가 질문마다 대답하면 되니까. 꼭 내가 어릴 적에 할머니를 귀찮게 굴었던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민정숙’에 대한 기억은 쥐고 있어 주라. 나는 그에 대해 잘 몰라 답을 내놓을 수도 없단 말이야. 내가 할머니 이름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을 때까지만이라도. 알겠죠. / 보고 싶어. 주말에 보러 갈게요. / 사랑해.
이번 영상은 그 숙제의 출사표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 승비가 걸어가고자 하는 길이 순탄치 않으리란 사실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업이 완수될 때까지 함께 지켜보고, 기록할 것이다. 이미 민정숙의 이야기와, 승비의 마음을 알게 되어버린 까닭이다.
‘미정이 큰딸’의 걸음을 응원하며, 무니지니
사진 승비